동국대 총동창회
 
 
 
삼진식품(주) 박종수 회장 인터뷰
  • 최고관리자 | 2021.10.07 10:36 | 조회 1519

    바른 먹거리를 통해 최종 소비자에게 더 높은 가치 제공

    종합식품회사로서 1조 시장 겨냥, 2023년 코스닥 상장 예정

     

    베이커리용 어묵 인기백화점 입점 · 세계 각지 수출 등

     

    재학시절 후문 막걸리집 말술로 통해

    뜨거운 야구 응원전 추억으로 남아

     

    삼진어묵하면 대한민국 주부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반찬용과 꼬치용의 어묵.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제품의 맛과 영양이 풍부하고, 그래서 아이들 도시락 반찬에서 지금은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매장에서 다양한 제품을 쉽게 구입해 대중식사처럼 먹을 수 있게 진화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를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로 키운 이가 인도철학과 72학번 박종수 동문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부산역에 도착하자 박 회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회장으로서의 위상을 말해주기보다 사람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그의 안내로 부산역 옆 삼진어묵 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는 부산역 안에 매장이 있었으나 수년 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10층 쯤 되는 빌딩 건물 1층과 2층에 매장이 있고, 그 옆 건물에 사무실이 있다. 부산 영도구에 본사가 있지만, 교통 좋은 곳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상담하기 위해 이곳에 사무실을 두었다.

     

    2층의 드넓은 홀의 한켠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진행되는 동안 여러 가지 어묵이 탁자에 올라 하나하나 맛을 보는데, 하나같이 구수하고, 맛이 깊었다.



    -자료를 통해 삼진식품주식회사가 어떤 회사인가 살펴보았습니다만, ‘삼진어묵이 브랜드화돼있더군요. 삼진어묵 역사부터 소개해주시지요.

    삼진어묵은 1953년부터 3대에 걸쳐 이어져온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 브랜드입니다. 1953년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자 값싼 단백질 공급원을 제공하기 위해 선친(1대 박재덕 회장)께서 영도의 공동어시장의 한켠에 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덴뿌라와 오뎅용으로 어묵을 만들었다. 사용된 재료는 명태 조기 갈치와 잡어 등이었다. 선친의 사업 목표는 가장 좋은 재료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양보충을 충분히 하도록 해주게 한다는 것. 그래서 그날 들어온 물고기를 쓰기 위해 영도시장에 공장을 차렸다.

     

    유년시절부터 소년시절까지 어묵공장에서 지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도 부모님을 따라 어묵을 만들었지요. 날생선을 대형 믹서기에 넣어 갈아서 반죽된 재료를 가지고 동그랑땡, 사각형 오뎅을 만드는데 소년시절부터 일손을 거든 것입니다. 어묵공장 2층이 안집이었으니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놀았다고 봐야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생산 공장 설비를 확장하고 품질도 고급화했다.

     

    초창기엔 물고기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전체를 어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뼈가 씹히는 맛이 있었지요. 굶주리던 시절에는 씹히는 맛이 나는 어묵이 통용되었습니다. 사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통째로 갈아서 어묵을 만들면 고소한 맛이 더 나지요. 하지만 입맛이 고급스러워지고, 까다로워지면서 살코기만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맛좋기로 널리 소문이 나다보니 거래선이 일기장에 반장 정도 채워치던 것이 얼마 안가서 한 장으로 늘어나고, 그 얼마 후에는 두장 석장 씩 늘어났다. 따로 영업직을 둔 것도 아닌데, 어언간에 시내 점포에 몇 백상자 어묵을 공급하는 일이 생겼다.

     

    무엇보다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을 제일 모토로 했다. 광어를 쓰고 명태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수년래 명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니 비싼 알래스카산 명태를 수입해 쓴다. 이러는 사이 매출 20억원 규모를 자랑하는 상황이 되었다.

     

    좋은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광어를 양식하는 기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연구진이 하림이 통닭을 보름만에 공급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바다에서 물고기를 영양 풍부한 성어를 빨리 길러 공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업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다. 경쟁사들이 각축을 벌이고, 대기업 식품회사들이 백화점에 진출해 어묵 시장을 장악하자 선친과 큰형이 경영하던 기업이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렀다. 대림, 동원, 한성, 나중에 이름을 바꾼 CJ 등 대기업 어묵들이 시장을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급히 내려오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가 보기로는 어려서부터 제가 가장 부지런히 일했고, 회사 현실을 잘 안다고 보신 것이지요. , 세 형제중 공장 운영에 적임자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투입되어 기울어져가는 회사를 다시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아내의 이름을 따서 엄마 맛이 나는 이금복 어묵 세트를 만들어낸 것이 불티나게 팔렸으니까요.”

     

    이금복 어묵 세트는 어느새 삼진어묵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다시 기반을 잡자 공급이 달리기 시작했다. 영도구 봉래동의 영도공장을 신축하고, 2000년에는 같은 장소에 다시 공장을 확장하고, 2011년에는 사하구에 장림공장을 신축했다. 식약처가 공인하는 HACCP(식품안전관리인정원)에 등록되었다.

     

    1986년 사장 자리에 올랐지만 박 회장은 종업원들과 24시간 함께 하는 생활을 했다. 가족처럼 한솥밥을 먹었다. 부득이한 일로 퇴사한 종업원들이 밥맛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재입사한 경우도 있었다. 사장의 밥과 종업원의 밥이 똑같고 외부 일을 하다가도 가능한 한 식사를 종업원들과 함께 하기위해 공장으로 들어서니 문자 그대로 종업원과 경영진이 하나가 되었다. 이런 환경이니 좋은 제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거래선이 대폭 확장되었다. 그 중 부산역에 점포를 낸 것이 대표적이다. 제품의 맛과 영양이 풍부하니 매일 손님들이 줄을 서서 삼진어묵을 사갔다. 하루 매출이 7000만원이 되었던 적도 있다. 영수증 발급기 4대가 동원되어 한 대당 2000만원씩 찍어냈다.

     

    매일 이렇게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니 박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다시 위기가 왔다. 그는 마국 뉴욕대학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는 장남(박용준 현 대표이사)을 불러 현장 투입했다. 박용준 대표이사 사장은 본래 미국에서 회계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박용준 대표가 한국에 들어온 2011년 경에는 어묵 산업이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형 유통 매장과 온라인 채널은 대기업이 장악했고, 도매상과 전통 재래시장에 납품하는 작은 생산 공장은 그들끼리 경쟁이 치열해 시장 기능이 상실되는 환경이었다. 같은 목표와 같은 고객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되니 갈수록 문제가 심각했다. 그 누구도 어묵 산업에 혁신을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고 경쟁하는 처지에 어묵 업체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가격 경쟁뿐이었다. 이는 서로 죽자고 하는 일이었다.

     

    이때 박용준 대표가 들어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일군 회사를 새롭게 체질 개선에 나섰다. 아들 박 대표는 도매상이나 대리점과 B2B로 해오던 거래를 B2C(기업과 소비자간의 직접 거래)로 전환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 최초로 어묵베이커리 사업을 펼쳤다. 이를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했다. 2017년에는 싱가포르점을 오픈하며 해외 진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신세대 CEO인 아들 박 대표가 들어오면서 모든 온라인 오픈마켓에 메일을 보내고, 홈페이지 메인에 삼진어묵을 걸었다. 소셜 커머스에서 1만원짜리 삼진어묵을 6000원에 팔자 B2B만 상대하던 직원들이 다소 반발했으나 B2C로 사업 구조를 선회해야 한다며 직원들을 설득해 소셜 커머스에 올린 지 하루 만에 2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이렇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 세계인들이 어묵을 즐길 수 있도록 경쟁력있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갔다. R&D에도 투자 확대하여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최근에는 물류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 스마트 물류를 구축했다.

     

    반찬용과 꼬치용, 두가지 용도의 어묵을 소비자들이 80여종으로 골라먹을 수있도록 제품 개발을 했고, 베이커리용 어묵을 선보였다. 길거리 음식으로 치부되던 어묵을 백화점에 입점시켰고 세계 각지에 수출했다. 그 결과 매출이 초창기 20억원에서 지금은 코로나 19를 겪고 있어도 1000억원으로 성장했다. 언텍트 환경에 맞춰 온라인 판매에 새 길을 연 결과다.

     

    바른 먹거리를 통해 최종 소비자에게 더 높은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

     

    어묵 디저트의 첫 시작이었던 어묵 고로케는 그의 아내 이금복 여사가 30여 년 이상 어묵을 만들어 온 손에서 탄생했다. 박 회장과 박 대표는 직원 식당 점심메뉴로 나온 돈가스를 보고 어묵에도 빵가루를 입혀 튀기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메뉴를 개발한 것이 주효했다.

     

    2013년 어묵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고 새로운 콘셉트의 매장은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 고객들은 시장통에서나 판매되는 어묵이 어묵크로켓·단호박어묵·치즈말이어묵·베이컨말이어묵 등 60여 종의 다양한 어묵을 골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카페처럼 어묵 매장을 만들고, 통유리로 된 오픈 주방을 개방했다. 어묵이 비위생적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어묵 조리 과정을 소비자들에게 공개했다. 비린내나는 생선이라는 이미지를 단박에 깼다.

     

    좋은 원료와 철저한 위생 관리로 차별화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지요. 재래시장통에서나 거래되던 볼품없는 어묵이 고급 어묵으로 포지셔닝해나가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입니다.”

     

    -대학생활의 추억담을 얘기해보시지요.

    모교 야구팀 경기 때, 동대문 야구장에 나가 목청껏 응원하던 추억이 그립습니다. 김성한 선수 등 모교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던 시절입니다. 인도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1지망이 떨어져서 2지망으로 간 결과입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 집안인데, 그래서 그런지 적성에 맞았어요. 이기영, 서경수, 원희범, 송석구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엔 학생시위가 많았습니다. 시위대를 선도했지만 내가 날렵해서 잡히지 않았지요. 후문이 당시엔 정문이었는데, 후문 옆 홍탁집에서 막걸리깨나 마셨습니다. 체구가 작지만 술이 말술이었죠. 그곳에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있지요.”

     

    그런데 지금 그의 종교는 개신교다. 둘째형이 목사가 되어서 부득이 집안 식구들의 평화를 위해 개신교로 바꿨다는 것.

     

    -보람된 말씀을 들었으니, 가장 후회되고 아쉬웠던 점을 든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이들 학교 졸업식에 가보질 못했습니다. 아내도 역시 앞치마를 두르고 생선을 토막내 어묵을 만드느라 아이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질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아이들이 번듯하게 자라 자기 몫을 다한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데 아이들 졸업식에 가지 못했던 것이 늘 가슴 저립니다. 그만큼 먹고 살기가 바빴지요.”

     

    장남에 이어 차남 박성우 씨도 삼진어묵에서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모교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경쟁이 치열한 시대, 한 우물을 파되 1인자가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23년경 코스닥에 회사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와함께 종합식품회사로서 1조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뉴욕 맨하튼에 지점을 두고, 유럽으로도 진출할 계획이다. 충청 지역에 공장 부지를 구입해 중부공장을 신축해 국내 1위의 아성을 더욱 견고하게 쌓을 계획이다.

     

    이계홍<65국문학과, 총동창회보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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