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신상순 한국일보 선임기자
  • 관리자 | 2015.01.08 10:31 | 조회 2479

    [기자 25시]


    신상순(77/84농학) 동문은 재학시절 '동국대학교 동창회보' 전신인 '東友會報' 사진담당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던 동국사랑이 남다른 동문입니다. 또 모교 사진동아리 '동그라미' 회원출신으로 사진분야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갖고 한국일보에 입사해서 30여년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 부장을 거쳐 다시 선임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구랍 31일 한국기자협회보에 실린 기사를 전재했음을 밝혀둡니다.(관리자)




    “난 그냥 사진기자…아픈 눈물 있는 현장 지키는 게 숙명”


    칼바람·불볕더위에 꽉 움켜쥔 카메라 30년째 ‘결정적 순간’ 포착하러 다녀
    위안부 최초 고백 故김학순 할머니 통한의 눈물 흘리는 사진 기억 남아
    “기자 임무는 누가 뭐래도 기록” 현역 최고참 권주훈 기자 롤모델


    한 장의 사진이 20장의 원고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사진기자들은 그 ‘결정적 순간’을 위해 항상 현장과 호흡한다. 1984년(견습 41기) 입사 이래 30여 년, 격동의 민주화 운동현장부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까지. “현장에 있는 한 계속 새로운 뉴스를 찾아다니고 싶다”는 신상순 한국일보 선임기자의 일상을 12월 19일과 29일에 걸쳐 들여다봤다.



    예상치 못한 ‘순간포착’이 특종 되기도
    최저기온 영하 8도를 기록한 12월19일 오전 9시 한국일보 편집국. 추위와 기다림에 익숙한 관록의 신 기자는 오리털 점퍼 두 개를 겹쳐 입고 등장했다. 


    이날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 어깨에 카메라 두 대를 걸친 그는 한주형 인턴기자와 함께 곧바로 취재차량에 몸을 실었다. 초년병 시절 민주화운동 현장을 가장 많이 취재했다는 신 기자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민주화는 국민이 쟁취했는데 그 열매를 따먹는 세력이 너무 많아요.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방기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는 계속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 취재를 나서다 한국일보 편집국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신상순 선임기자. 10년 간 데스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취재현장으로 돌아온 신 기자는 “명칭이 어떻든 난 그냥 사진기자다. 기자는 기자일 때 최고인 것”이라고 했다. (사진=한주형 한국일보 인턴기자)


    9시20분경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에 도착했다. 이미 헌재는 취재진과 경찰 병력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신 기자는 대심판정 앞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통진당 지도부가 이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담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길 수 있어요. 현장이라는 건 아무도 예상을 못하죠.” 지난 199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붉은 페인트가 든 달걀을 얼굴에 맞은 것도 예상치 못한 ‘순간 포착’이 가져온 특종이었다(고영권 한국일보 기자 ‘YS의 봉변’). 통진당원들이 대심판정에 들어서고, 이 모습을 사진기자들이 담아내는 데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내 대심판정 건물 앞에 포토라인이 만들어졌다. 각 언론사 사진기자와 촬영기자들은 판결 후 통진당 지도부의 표정을 담기 위해 포토라인을 중심으로 모였다. 신 기자도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장갑과 모자, 목도리로 중무장을 했지만 칼바람은 피할 수 없었다. 겨울과 여름처럼 극단을 오가는 계절은 사진기자들에겐 고역이다. 


    신 기자는 후배가 건넨 핫팩을 들고 건물 안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 2014년 12월은 어느 때보다 사건이 많은 달이었다. 정윤회씨와 박지만 EG 회장의 연이은 검찰 출석,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국토교통부 조사 등 한주 동안 빼곡한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김현철씨부터 박지만 회장까지, 대통령 친인척들을 검찰에서 많이 보게 된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40여분 동안 기다린 끝에 “설마 해산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통진당 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포토라인에서는 통진당 변호인단에 이어 당 지도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침통한 표정의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부 기자들이 욕설과 고성을 터뜨렸다. “야!” “마이크 내려!” “거기 기자들 앉아요!” 신 기자는 수십 명의 취재진 사이에서 카메라를 바꿔가며 침착하고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11시쯤 기자회견이 끝나자 이정희 전 대표에 기자들이 따라붙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사진기자들 따라가지마!” 이 또한 기자들 사이에 합의된 규칙이었다.


    현장에는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룰이 존재한다. 중앙일간지 6개와 지상파 방송사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많은 매체들이 격렬한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다. 신 기자는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한 경쟁이 돼야 하는데 자사를 위한 경쟁, 시청률을 위한 경쟁을 하니까 기레기라는 말을 듣는 것”이라며 “매체가 많아질수록 명품이 생겨야 하는데 인기에 연연하는 시대가 돼 버렸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빠듯한 일정에도 기획물 연재
    신 기자는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회사로 복귀했다. 현장 취재를 끝내고 나면 그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진다. 바로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신상순의 시선’ 때문이다. 시의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에 적절한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아이템을 선정해야 한다. 12월2일에는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체력전문학원을 취재했다. 공무원 연금개혁 논란이 한창일 당시 “‘그래도 공무원’이란 다짐”을 가지고 “경찰 및 소방직 체력 시험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수험생의 현실을 조명한 사진이었다. 이어 9일에는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교실을 통해 “희생자 가족과 생존학생들은 책걸상과 유품, 추모 글귀로 가득한 2학년 교실 10개 반을 친구들이 졸업하는 내년까지 유지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번 주에는 강원도 철원 6사단, 김포시 한강 어촌계 등을 스케치 했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새벽에는 노량진 수산시장을 취재할 생각이었지만 아침 일정 때문에 취소했고, 전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국일보 사진부 소속 기자는 10명. 이 중 기획팀과 데스크를 제외한 5명의 기자가 스트레이트를 담당하고 있어 연재물과 병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그는 “기자는 작가가 아니다”라며 “회사에 맞추고 쪼개가며 일해야 유능한 기자다. 시간 넉넉히 주고 정해진 것만 찍으라고 하면 못할 사람이 누가 있나”라고 반문했다(결국 신 기자는 12월21일 서울 동작구 통합진보당사에서 통진당 로고와 간판이 요동을 치는 듯한 사진을 찍어 23일자에 실었다).


    점심식사 후, 지면에 들어갈 사진을 고르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이날 찍은 수백 장의 사진 중 적절한 사진을 골라 ‘화상 데스크’에 올려놓으면 데스크가 지면에 실을 사진을 선택하게 된다. “찍는 것보다 고르는 게 어렵죠. 대충 고르면 좋은 걸 찍어놓고도 바보가 될 수 있어요.” 신 기자는 이정희 전 대표와 통진당원들의 ‘표정’에 방점을 뒀다. 통진당 해산에 따른 침통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다. 디지털 시대에는 몇 장을 찍었는지는 중요치 않다는 게 신 기자의 생각이다. ‘결정적 순간’이 있는지 여부가 그날 지면의 질을 결정한다. 사진의 여백과 편집방식에 따라 그 느낌도 확연히 달라졌다. 30년차 기자의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0년간 데스크 보면서도 현장 지켜
    신 기자는 지난 2006년까지 10년 간 데스크 생활을 하면서도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사진부장 재직 당시에는 탐사보도를 정착시켜 후배들의 역량을 키웠다. ‘로드킬’(박서강 기자)이 그 계기였다. 2005년 6월부터 두 달 간 카메라를 통해 로드킬의 실태를 고발, 한국기자상과 한국보도사진전 대상을 수상했다. 부장 생활을 마친 후에는 본격적으로 현장에 돌아왔다. 잠시 편집위원 직함을 달았다가 이충재 당시 편집국장의 제안으로 선임기자가 됐다. 그는 “명칭이 어떻든 난 그냥 사진기자”라며 “기자는 기자일 때 최고인 것”이라고 했다.


    12월19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앞. 신상순 기자(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선고 후 열릴 통진당 지도부 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다.

    ▲ 12월19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앞. 신상순 기자(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선고 후 열릴 통진당 지도부 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다.


    천생 기자인 그가 생각하는 ‘좋은 보도사진’이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는 뉴스가치와 사진가치가 어우러진 사진이 최고의 사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선후배들은 그런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는 아직 못 찍어본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편집국 사진부 한편의 작은 공간에는 한국일보 60년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자료들이 가득했다. 그는 ‘5·18 광주항쟁필름’이라는 빛바랜 파일을 꺼내들고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는 선배인 권주훈 뉴시스 기자(전 한국일보 기자)의 이야기를 유독 많이 했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사진기자 중 최고참인 권 기자는 ‘나이’가 아닌 ‘특종’으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사회를 바꿔놓은 사진을 많이 찍었다는 의미였다. 1986년 서울대 농대 원예과 학생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경찰은 물러가라’ ‘미제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학생회관에서 투신한 사건은 ‘이동수군의 분신’이라는 제목으로 외신에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한 시민이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의 뺨을 때린 순간을 찍은 것도 ‘찰나’를 포착한 특종이었다.


    신 기자는 자신의 사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1991년 8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고백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사진을 꼽았다. ‘위안부 할머니의 첫 증언’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기사는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정신대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김 할머니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담았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공론화시킨 사진으로 평가받아 제29회 보도사진전 특별상을 수상했고,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에도 실렸다.


    이처럼 사진기자는 “힘든 자리, 아픈 눈물이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이 숙명”이라고 그는 말했다. 2014년,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지만 격려보다 비난을 많이 받았던 후배기자들을 안쓰러워하던 그였다. 시청률과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일부 매체가 언론 전반의 신뢰를 깎아내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임무는 누가 뭐래도 ‘기록’입니다. 칭찬을 받든, 욕을 먹든, 그건 두 번째 문제죠. 선배들이 5·18 광주 항쟁을 취재할 때도 사진기를 빼앗기고 총을 든 사람들에게 협박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우리가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하면 나중에 너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에 좌절하지 말고 이겨내고 나아가자는 말을, 후배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12월29일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 앞에서였다. 여느 때처럼 두터운 점퍼를 입고 두 대의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제안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자회견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은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은 장그래 죽이기법”이라며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 대책을 규탄했다. 신 기자의 사진은 12월30일자 3면과 5면을 통해 보도됐다. 


    30년 전, 한국일보에 합격해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실린 것이 바로 엊그제인 것 같다. 수많은 사건·사고를 취재했지만 강산이 세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만큼 많이 잊어버린 거겠죠. 1년 단위로 30번이 지난 게 아니라 5년 단위로 서너 번 정도 지난 것 같네요.” 특별하지 않은 그의 일상이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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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 찾아 전국 방방곡곡 순례
    통일되면 북한 오지 찍고 싶어


    신 기자가 ‘사진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0년대 한국일보에 실린 야생동물 르포 때문이었다. “집에서 한국일보를 구독했어요. 그 당시에 새랑 곰 등 우리나라 동물 사진이 계속 실리는 거예요.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이파리를 딱 물고 있는데…. 한륭 선배가 취재기도 쓰셨던 기억이 나요. 그 때 사진기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죠.”


    이후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동국대 농대에 진학했다. 사진을 배우기 위해 유명 사진동아리 ‘동그라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노재덕 선배(전 경향신문 기자)가 사진기자가 됐다는 소식에 ‘나도 한 번 해볼까’라며 한국일보에 지원한 것이 ‘기자 인생’의 시작이 됐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취재는 단연 민주화 시위현장이다. 신 기자는 입사 후 주간한국에 3년 있는 동안 시위 현장을 전담했다. 매일 방독면을 쓰고 나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도 틈틈이 기획취재를 했다. 제목은 ‘한국의 오지’였다. 1986년부터 88년까지 연재된 이 기사를 위해 신 기자를 포함한 사진부 기자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볐다. 


    신 기자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해 2009년 ‘신상순의 다시 가본 한국의 오지’를 6개월 간 연재했다. 여전히 ‘마음 속 고향’ 그대로인 곳도 있었지만 인적이 끊겨 사라진 마을도 있었고, 천박한 유흥지로 변해버린 곳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동안 취재한 것을 정리해 전시회도 열라”고 조언하지만 그는 “이 시간은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욕심껏 현장을 다니겠다”며 은퇴 후로 미뤘다.


    그의 최종 목표는 통일된 한국을 취재하는 것이다. “정치적 얘기는 빼고 순수한 우리 땅을 취재하고 싶어요. ‘한국의 오지’를 다시 한 번 연재해 북한까지 통일된 대한민국 영토를 찍는 거죠. 스트레이트 기사도 좋지만 이런 취재가 좀 더 ‘나만의 사진’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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