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연천 530GP 피격 사건 미스터리[월간조선 6월호]

송영인 | 2017.06.12 18:11 | 조회 3518

***. 존경하는 애국시민 여러분 월간조선 오동룡기자님의 애국적인 기자정신을 발휘하여 혼혈의 노력을 기울려 "월간조선 6월호"의 기사로 보도된 이글을 보다 많은 국민들에게 전파하여

적 도발 사건을 아군의 자작극사건으로 둔갑시키고 각종 증거물을 은폐, 조작하여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 바친 고인들을 친북정책의 희생양으로 만든 천인공노할 극악무도한 국기문란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많은 애국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연천 530GP 피격 사건 미스터리… 검찰 재조사로 풀리나

최초 “북한 측 미상(未詳) 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보고…

1시간도 안 돼 ‘내부 총기난사’로


⊙ 유족, 부검 군의관 검찰 고발… 검찰, 3월 초부터 유족 등 관계자 불러 조사
⊙ 정동영 장관, 정상회담 조율 위해 방북… 리동수 북한군 하사 검거하며 차단 작전 실시
⊙ 최초 “북한 측 미상(未詳) 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보고…

    1시간도 안 돼 ‘내부 총기난사’로
⊙ 김동민 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
⊙ 유족들,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8명의 대한민국 아들들이 명예를 회복하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05년 6월 19일 국군 장병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은, 일명 ‘김일병 사건’으로 불리는 ‘530GP 피격 사건’의 진실이 12년 만에 밝혀질까. 3월 30일 오전 10시경 기자는 서울중앙지검 516호에서 ‘530GP 피격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진술을 했다. 10년 전 피격 사건 생존자를 인터뷰했기 때문이었다.
  
  올 3월 검찰은 12년 전 발생한 ‘김일병 사건’에 대해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2005년 6월 19일 새벽 연천의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530GP) 내무반에서 발생했다는 ‘김일병 사건’은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기관총 44발을 난사해 GP장 김종명 중위(ROTC 42기) 등 장병 8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발표된 사건이다.
 
  국방부는 “평소 선임병들에게 괴롭힘과 가혹행위를 당하던 김동민 일병이 근무를 나갔다가 수류탄과 실탄 등을 확보, 소초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세면장, 식당 등에서 총기를 난사해 장병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형이 확정된 김 일병은 국군교도소에 12년째 수감 중이다.
 
  하지만 일부 유족과 연천 530GP 피격 사건 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대표 송영인 회장)는 “북한군의 소행을 남북관계를 위해 조작·은폐했다”며 수년간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고, 이번에 시신을 검안했던 군의관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재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사망한 장병들의 상처가 수류탄 파편이나 소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사고 당시 최초 보고에는 ‘미상(未詳)의 화기 9발 피격’이라고 돼 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유성호 대위가 ‘총상에 의한 삽입구는 거리에 상관없이 형태가 일정하며 탄환의 직경보다 작다’는 기존의 총기 법의학적 이론을 부정하고, 20~30mm 심지어 50~60mm 크기의 파편 상처도 K1 소총에 의한 총상의 삽입구로 허위 검안했다고 주장했다.
  
  
  남북관계 경색 막으려는 조치?
  만약 군 수사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북한군 침투조의 이동을 막기 위한 차단 작전 중 북측의 발포로 발발한 교전이었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사건을 조작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 송영인 회장은 “2005년 6월 21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전력 지원, 쌀 지원,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등 굵직한 현안들을 논의했다”며 “전방 GP 교전이 알려지면 남북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고 정부와 군 당국이 이를 우려해 벌인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남북은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다”고 했다.
  
  사건 당시 청와대에는 노무현 대통령, 김우식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이종석 NSC 사무차장,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정부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필두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 윤광웅 국방부 장관 등이 재임하고 있었다.
  
  당시 군 수사기록과 상황 보고서, 부대일지, 장병 진술서, 530GP 병력 현황, 시체 검안서, 증거물 감정서 등을 입수해 유족들의 주장과 대조해 보면 의문점투성이다.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30분경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81연대 530GP에서 ‘꽝’하는 폭음과 총성이 울렸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대응사격은 했는가” “상황을 보고해라” 등 전시 상태를 방불케 하는 무전이 오갔다.
  
  GOP대대 상황병은 ‘미상 확인 적으로부터 9발 피격’이라는 급전을 날렸다.

 

81연대에는 북한군의 공격 시 발령하는 매트릭스가 발령됐다. 다른 부대 및 상급 부대에도 상황이 전파됐다. 연대 간부들도 모두 비상 소집됐다. 이 상황은 고속지령대(각급 부대 지휘관 간의 긴급통신망)를 통해 합동참모본부(합참)에까지 보고됐다. 이 부분까지는 문서로 확인된 ‘팩트’다.
  
  
  차단 작전 중 적 포탄에 피격
 
2010년 6월 8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시민단체들과 유가족들이 ‘연천 530GP 피격 사건 진상규명 촉구 국민협의회’를 발족, 기자회견을 갖고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유가족들은 숨진 장병들의 시신 사진과 엑스레이 사진, 전역한 동료 장병들의 증언들을 모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2005년 6월 19일 530GP에는 육군 28사단 81연대 수색중대가 경계 중이었다.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 530GP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수색중대 병력 14명은 해당 지역에 발령된 ‘진돗개 둘(대침투 작전 단계)’에 따라 인근 지역에서 ‘차단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GP에서 실시하는 차단 작전은 월북하려는 적이나 불순세력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고 발생 2일 전인 6월 17일 오전 6시55분,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북한군 리동수(20세) 하사를 5사단 지역 철원군 대마리에서 검거하면서 군은 ‘진돗개 둘’을 발령했던 것이다. 이튿날 6월 18일 28사단 81연대는 GP주야간 차단 작전, 수색매복 실시 등 최고조의 경계근무 태세를 유지했다.
  
  군 관계자들은 “차단 작전은 보통 주간 작전(14~16시)과 야간 작전(23~1시)으로 나눠 실시한다”며 “통상 오전 1시 이후에는 적으로 오인할 수 있어 1시 이전에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30GP 피격 사건은 6월 19일 오전 1시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당시 530GP 주둔 병력 가운데 차단 작전에 참가한 사람은 상병 이상. 전군에 최고 수준의 경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이라 ‘실제 교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지휘관 김종명 중위가 ‘고참’만 데리고 노루골 지역으로 작전을 나갔다고 한다.
  
  차단1조는 김종명 중위(사망), 통신병 김인창 상병(사망), 소총수 차유철 상병(사망)이었고, 차단2조는 전영철 상병(사망), 이태련 상병(사망), 유민호 일병(경상), 임창용 일병(부상 없음)이었다. 지원조는 조정웅 상병(사망), 신태준 상병(경상), 박준영 일병(경상)이었고, GP에 대기한 지휘조는 부GP장 최충걸 하사(부상 없음), 통신병 김유학 일병(경상), 의무병 현규대 일병(부상 없음), 소총수 정은총 상병(부상 없음) 등이었다.
  
  군 발표에 의하면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을 난사했는데,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던 지휘조만 온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차단 작전을 수행하던 1, 2조와 지원조에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것은 내무반 내 총기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차단조가 나간 사이, 갑자기 ‘쾅’하는 폭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인수인계를 위해 미리 GP에 와 있던 후임 소대장 이인성 소위는 남은 병력에게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GP에 남아 있던 신병들은 긴장했다. 폭음은 곧이어 6~7회 더 들렸다. 그러고는 정전이 됐다. 북한군 침투조의 RPG-7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신임 소대장과 GP에 남아 있던 병력은 즉각 상황을 대대 상황실에 알렸다. 대대 상황실은 ‘고속지령대’를 통해 연대 상황실과 사단 사령부, 육군본부, 합동참모본부 상황실에까지 당시 상황을 알렸다. 이때 530GP에서 처음 보고한 상황 전파 메시지는 이랬다. “북한 측 미상화기 9발 피격, 5명 사망.”
  
  
  “진지 점령 후 복귀하다가 사고 발생”
  2005년 6월 19일 오전 1시 무렵, 530GP 주둔 중이던 수색중대 병력 14명은 철책선 전방 1.5km 지점에서 차단 작전을 수행한 뒤 복귀 중이었다. 이때 RPG-7로 추정되는 로켓추진폭탄 7~9발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적은 차단 작전을 하던 병력 주변과 530GP 옥상에 화력을 집중했다. 아군이 대응할 틈은 없었다.
  
  연대 본부는 상황에 따라 즉시 ‘원칙’대로 대응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1시간도 채 되기 전에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부 총기난사’로 결론을 내더니 사상자들을 옮겨 시신을 내무반, 욕실, 취사장 등에 배치하고는 사고 현장을 위장했다.
  
  부대일지를 근거로 530GP의 개인화기 K-1/K-2는 모두 34정이었으나, 수사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무기를 반납한 사진에는 20정뿐으로 14정이 부족했다.

 

차단 작전에 나갔던 인원은 14명. 유족들에 따르면 사고 후 부대에서 보내온 사망자 유품에 전투복이 없었다. 국방부 발표대로 취침 중 사망했다면 전투복은 장병들의 관물대에 깨끗하게 개켜져 있어야 했다.
  
  새벽 2시에 김종명 중위는 체력단련장에서 사망했고 조정웅 상병은 취사병이 아님에도 취사장에 있었다 했다. 상처는 총상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포격으로 인한 열상(裂傷)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들의 응급후송도 4시간이나 늦춰졌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도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당일 새벽, 유족들은 연대 지휘통제실장이었던 정판영 대위(수색중대장)로부터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지, 누구도 ‘내무반 총기사고’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2007년 10월경 기자는 ‘차단 작전’에 참가했던 박준영 일병을 그가 복학해 다니던 안산공대에서 만났다. 그의 진술은 너무도 구체적이었다.
  
  “사고는 진지 점령 후 복귀하다가 발생했다. 내무반에서 난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귀하다가 당한 것이다. 당한 곳에서 GP까지의 거리는 700미터 정도였다.

 

앞쪽에서 꽝 소리가 들렸다. 포탄은 거의 동시에 떨어졌고 상황은 몇 초 만에 끝났다. 복귀하자마자 전투복을 벗으라고 해서 벗었고 그걸 다 태우더라.

 

최초 군이 비디오를 찍은 시각이 6월 19일 오전 7시15분이었다면 그 시간이면 사후처리 다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7시 뉴스를 보았다.”
  
  박준영 일병은 당시 부상당한 발뒤꿈치를 걷어 올려 기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으나, 기자에게 당시 상황과 함께 사건 이후 행적에 대해 들려줬다.
 
  “수사를 받는데 짜증이 났다. 헌병대 수사과장이 맨날 갈구고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병원에 있을 때 국방장관이 왔고 기자들도 왔다. 병원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네 말 한마디에 따라 여파가 크니까 적절히 둘러대라고. 뭘 어떻게 둘러대라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이 질문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뉴스를 보니 박준영 일병만 진술 내용이 다르다, 저 애만 이상하다는 식으로 나왔다. 병동에서 나만 나쁜 놈이 됐다.”

  
  박준영 일병은 상부의 감시와 압박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병 수사과장이 와서 뭐라고 했다. 너 친구한테 전화해서 말한 적 있느냐 하기에 부모님한테만 말했다고 했다. 너 그러지 마라. 그러면 구속된다고 겁을 주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왔다. 나를 간부병실에 뒀다. 내가 나갈 때마다 간호장교가 따라다녔다. 수사받기 전에 각서를 썼다.

 

네가 말한 내용에 대해 밖에서 누설하면 안 되고 어기면 처벌받는다는 식으로 정신교육을 했다. 휴가를 가서도 친인척만 만나고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된다고 했다. 대대장이 그랬다. 전역하고 나서도 보급부대에서 챙겨주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박 일병은 사건 직후 부상자들의 응급처치와 후송이 늑장조치된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는 “(차단 작전에 나갔다가) GP로 옮겨진 부상자들에 대해 아무도 치료하지 않았다”며 “겁이 났다.

 

그래서 피가 질질 나오는 데도 그냥 뒀다”고 했다. 그는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때 그냥 수건을 대주는 정도만 했다”며 “다 끝나고 나서 부GP장(최충걸 하사)이 오더라”고 했다.

  
  
  김동민 일병 가혹행위자들이 국가유공자라니…
 
연천 530GP 피격 사건의 희생자들. 530GP 피격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날, 이들은 전사자로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30GP 사건’ 이후 군 당국의 행태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고 김종명 대위·전영철·조정웅·박의원·이태련·차유철·김인창·이건욱 병장 등 희생된 장병들의 전투복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이들의 피복과 총기를 증거물로 보전하지 않고 모두 소각처리 했다고 한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530GP’는 즉시 폐쇄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소초 옥상을 흙으로 덮고 휴게시설을 만들었다.
  
  ‘530GP 사건’의 ‘범인’이라는 김동민 일병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는 다른 소대원들은 모두 조기 전역한 뒤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았다.

 

해당 부대 지휘관 가운데 김동민 일병에게 가혹행위를 저지른 데 대한 지휘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

 

단지 부GP장 최충걸 하사와 그의 당번병 김동민 일병만이 각각 상관명령 불복종 혐의로 징역6월(집행유예 2년), 530GP 총기난사 사건의 ‘악당’이 됐다.
  
  송영인 회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되었음에도 국가유공자가 없었다”

 

“단순 하극상으로 일어났다는 530GP 사건에서는 어찌하여 생존자 23명 중 김동민 일병을 폭행했다는 7명을 포함해 21명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시 한명숙 전 총리가 국가보훈심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530GP 사건’ 당시 군 주요 관계자들은 윤광웅 국방장관,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참모총장, 김관진 육군 3군사령관, 김은상 육군 28사단장, 오주석 81연대장 등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국가안보실장, 국방장관, 주중대사 등을 역임하거나 3군 부사령관(중장 보직), 미군기지이전사업 총괄팀장 등으로 영전했다. 당시 시신을 검안한 군의관 유성호 대위는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상주행
 
2005년 6월 24일 김동민 일병이 국방위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받은 뒤 헌병과 수사관의 호위 속에 이동하고 있다.
  송영인 회장은 ‘530GP 사건’의 의혹을 풀 수 있는

 

세 가지로 북한군 리동수 하사의 행적, 최충걸 하사의 입, 12년째 사형집행 대기 중인 김동민 일병 등을 꼽고 있다.

  
  송 회장은 국방부에 ‘2005년 6월 17일 인접 5사단 지역 철원군 대마리에서 생포된 북괴군 리동수 하사로 인해 군 차단 작전이 실시됐고 이 작전 중에 530GP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생포된 북괴군 리동수의 신병처리는 어찌 되었으며 그는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변해 주기 바란다’는 질의서를 보냈다.
  
  송영인 회장은 전 국정원 제주부지부장 출신으로, 전직 국정원 간부 21명의 모임인 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국사모) 회장을 지냈다.

 

송 회장은 “국방부 답신에 따르면 리동수가 귀순의사를 표시해 국정원 산하 하나원으로 보내 교육을 마치고 한국 사회로 편입됐다”며 “하나원에 물었더니 확인할 수 없었고 노무현 정권이 2005년 체포 당시 북으로 돌려보냈을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지난 4월 26일 기자는 송영인 회장과 함께 경북 상주로 최충걸 하사를 만나러 갔다. 10년 만의 방문이었다. 2006년 10월 22일 고 조정웅 상병의 부친 조두하씨(한국폴리텍대 교수)는 상주에 있는 최충걸 하사의 집을 찾아가 최충걸 모친을 만나 진술을 들었다. 녹취록 내용이다.
  
  “그 애(최충걸 하사)는 당시 폭발소리에 정신이 다 나갔었고 그 뒤로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이 아들한테 시신 배치까지 시켰다고 하더라. 피를 닦고 시체를 덮는 걸 충걸이가 혼자 다 했다고 하더라. 군대에서 지시하니 어쩔 수 없이 협조한 것이다.”

  
  조두하 교수는 2007년 3월 20일 또다시 상주로 찾아가 최충걸 하사의 말을 녹음하는 데 성공했다.
  
  “사고는 야간 차단 작전을 하고 돌아오다가 당한 것이다.” “걔들은 억울하다.” “전투복을 입고 나갔다.” “시신이동을 잘했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사고를 당한 지점은 GP로부터 직선거리 800미터, 길을 따라가면 1200미터 정도 될 거다.”
  
  기자와 송영인 회장은 아침 서울을 출발해 상주 그의 집 앞에서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기다렸다.

 

그때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최충걸 하사의 모친을 만났다. 그녀는 “제대 후 유족들도 찾아와서 윽박지르는 통에 아이가 민감해져서 부모라도 말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며

 

“지금은 결혼해 겨우 안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최 하사의 아버지 최모씨는 “4남매의 막내로 부모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군에 갔다가 6개월 만에 사고를 당해 징역형을 받고 전과자 신세가 된 아이가 딱하다”며

 

“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없는 살림에 변호사비 1500만원을 마련하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기자는 최충걸 하사 부모에게 연락처를 남기면서 “양심선언으로 본인의 명예도 회복하고, 저세상으로 간 동료 전우들의 명예도 살려라”는 말을 남기고 상주를 떠났다.
  
  
  김동민 일병,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2016년 6월 19일 대전 국립현충원 사병2묘역에서 연천 530GP 사건 1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유가족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 생존병사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정낙인
  2012년 9월 13일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 김형태 의원은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동민 일병을 찾아가 면담했다. 김 일병은 “네가 진짜 범인이냐, 아니냐를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김 의원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번에는 “2008년 5월 7일 고등군사법정에서 말한 것이 지금도 유효하냐”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 의원이 물은 ‘고등군사법원에서 말한 것’은 당시 김 일병이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장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재판장이 “무슨 질문이냐”고 했다. 김 일병은 자신의 범행이 “말뿐이지,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재판장은 “직접 증거는 없지만 주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판결을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이것을 재차 확인한 것인데 김 일병은 자신의 자백에 대해 ‘노코멘트’로 바꾸었다. 당시 김 의원과 동행했던 보좌관은 “김 일병이 내내 울기만 했다”라고 전했다.
  
  송영인 회장은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인데도 까다로운 면담절차를 거쳐야 했다”며 “사형이 확정돼 형 집행을 기다리는 군 출신 기결수는 통상 민간교도소로 이감되는데, 김동민은 이상하게도 12년째 장호원 국군교도소에서 철저하게 면회를 통제당하고 있다”고 했다.
 
  송영인 회장은 “김동민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목격자가 한 명도 없고 국과수 감정서에는 김 일병이 범행에 사용한 총이나 수류탄 고리에도 지문이 없었고 손에서도 화약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며 “현재까지 김 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다”라고 했다.
 
  3월 초부터 검찰이 ‘530GP 사건’ 재조사를 시작했다. 검찰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노무현 정권의 민정수석을 지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연천 530GP 피격 사건 박영섭 유가족 대표 회장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면서 “검찰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이 북한과 친북 세력에 의해 희생되고 사건이 조작·은폐된 사실이 있었는지 정확한 조사를 통해 진실 여부를 명확하게 가려내야 한다”고 했다.
 
  송영인 회장은 “독일을 위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1894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한 기자의 노력으로 100년 만에 프랑스군으로부터 무죄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며

 

“드레퓌스 대위 본인은 살아생전 명예회복을 보지 못했으나 자손들만은 오욕을 씻고 명예를 회복한 것처럼, 연천 530GP에서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8명의 대한민국 아들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