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 당선 - 노주혁 동문
  • 관리자 | 2015.08.19 16:48 | 조회 2375

    노주혁(75/82농생, 본 총동창회 상임부회장)동문이 지난해 년말 제30회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돼 수필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노 동문은 재학시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자산관리공사(CAMKO)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현대앨리베이터(주) 전무로 근무하고 있으며, 신용보증기금 비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다음 글은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신용보증기금이 발행하는 신보사랑방(2015. 7·8월호)에 실린 원고로 이를 옮겨 싣는다 (관리자 주)

     

    <제30회 백두산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대 한 민 국 과  나'


                                                           노 주 혁


    대한민국은 이제 충분히 먹고 잘 사는 선진국인가? 아님 아직도 이러저러 중간 쯤 되는 중진국인가? 가난에 찌들었거나 경제적 개념 없이 빈곤에 익숙하여 사는 후진국은 분명 아니고, 이미 우리 선진국에 진입하였던가. 아님 막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는 막바지에 있는 ‘곧 선진국’인가? 어쨌든 오래지 않은 기간 내 $76의 최빈 후진국에서 이 정도까지 왔음은 멋모르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됐던, 꼭 잘 살아봐야겠다고 작심하고 노력했던 간에 일본은 어떤지 모르지만 세계 각국의 찬사에 의하면 우리도 잘했다고 대견해 하고 있지 않는가.


    광복과 ‘김일성의 난’을 겪지 않고 60여년을 산 나는 그간 무슨 일을 하고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기여를 했는지. 한 마디로 ‘밥값을 제대로 했는지’를 자문해 본다. 아버지 세대가 피와 목숨으로 지켜낸 이 나라, 우리가 잘 지키고 멋있게 키워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50~60년대 거리에 넘쳐나던 걸인들, 쇠갈고리손을 내세우며 위협적인 동냥을 하던 상이용사, 4·19 때 다 헤어진 밀짚모자에 넝마를 지고 경찰의 위협사격에도 불구하고 시위 군중의 앞장을 서서 맹활약했던 다리 밑 넝마꾼들. 곧 이어 5·16! 시커먼 선글래스를 쓴 군 잠바 차림의 다부진 인상의 박정희 장군. 그 뒤 신문 지상에는 시장, 도지사는 지금 돌이켜보면 새파란 영관 장교나 별을 단 장군들로 채워졌었다. 아침마다 국민체조를 하고 새마을 노래를 들었던 어린 시절. 보통 형제나 남매가 5~6명인데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도 많다며 열을 올렸던 산아제한 캠페인, 전염병 예방을 위한 쥐꼬리 몇 개씩 자라오기 숙제, 폐품 모으기 운동, 도시락 혼식 검사, 분식 장려 운동, 무자비한 공산당, 뿔난 도깨비 모양의 김일성 포스터를 보며 반공·방첩 의식은 길러졌었다.


    저축만이 살 길이고 절약이 미덕이었던 그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일본은 일찍 문호를 개방한 덕에 앞서가고 있던 부러운 선진국, 말레이시아는 고무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한 나라, 필리핀은 농구 잘하고 장충체육관·광화문의 경제기획원 건물을 지었던 잘 사는 나라, 태국은 6·25때 파병했던 고마운 농업 부국.


    유신시대. 일선을 지켜야 할 베레모 공수부대원과 탱크가 대학 정문 앞에서 버티면서 위용을 자랑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했었고, 술자리에서 한참 열을 올려 시국을 논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면서 혹시나 해서 살그머니 목소리를 낮추던 그 시절.


    70년대 중반의 군생활. 욕과 상소리는 일상이고, 구타와 기합 대신 생긴 ‘얼차려’는 공허한 대외 전시용 가림막이었지. 참 매도 많이 맞았다.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이왕 때릴거면 취침 전에 맞았으며, 많이 다쳐서 후송이나 갔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군기 빠졌다고 단체 구타, 졸병이 겁대가리 없다. 대학 다니다 와서 건방지다고 기합주는 빼딱한 자격지심을 가진 국졸 출신의 고참. 하사·병 간의 계급 대 밥그릇 수 알력으로 M1과 칼빈 소총의 반무장 집단 칼싸움. 상급기관의 지시사항 이행을 위한 물자 훔치기는 물건의 위치 이동이라는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군대 뭐 같다, 뭐 같다 하면서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자위하였었다.


    전역 후 복학하여 연하의 동급생들과의 적응은 혹한기 훈련 시 눈보라에 노출된 맨살처럼 아렸다.


    ‘서울의 봄’ 6년 만의 총학생회 부활에 참여. 다시 몇 달만의 학도호국단 부활에 또 참여. 난 그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깡으로 버티어 냈다. 학생운동 한답시고 몰려다니면서도 정작 시위에는 별로 참여를 못했던 어중간 잽이었다. 절대 수강시간 부족의 상태에서도 이럭저럭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가, 학사 행정이 지금보다 후진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직장생활. 경기가 활기를 띄다보니 취업은 그런대로 잘 되었다. 은행 입행 후 업무 익히랴, 실력을 갖춘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되고자 학창시절 소홀했던 학업 보충하랴. 주경야독 한다는 자기 위안을 하며 술자리와 각종 모임으로 분주했던 대학원 시절. 국민 승리의 6·10 민주항쟁 전리품인 대통령 직선도 쟁취했었고, ‘손에 손 잡고’ 노래가 넘쳐나던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준비에 열 올리던 시절. 경제는 잘 굴러가면서 대다수 국민의 먹고 살기는 확실히 풍족해져 가고 있던 호시절도 지나고 올림픽이 끝난 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요구사항 분출로 노사갈등이 본격 노출될 즈음. 그 해 나는 중형 승용차도 굴리고, 아들도 얻고, 이듬해 책임자로 승진을 하면서 대우조선 산은 관리역으로 옥포로 파견명령을 받았다.


    폐업의 기로에서 선 극심한 노사분규, 후에 대통령을 지낸 모 인사는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하여 근로자를 위한답시고 그 나름의 논리를 펴면서 공허한 해법도 내어 놓았었지. 살벌한 준전시사태를 방불케 하는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그곳에서 벌어졌었던 사태들과 근로자들이 요구하는 막무가내식의 억지들은 나도 은행원의 입장에서는 근로자들이 요구하는 막무가내식의 억지들은 나도 은행원의 입장에서는 근로자였지만 상당히 과하게 느껴졌는데 내가 학창시절 무질서하고 다소 폭력적인 부분도 명분을 만들어 합리화시키곤 했는데, 과연 이 경우와 비교하면 무엇이 멎고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지금은 평가가 부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 당시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던 김우중 회장의 지근거리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나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건 따르고 저건 아니고 하는 생각들을 하며 귀중한 경험을 정리했었다.


    그 후 파견에서 복귀하여 직장에선 중견 간부가 되어 꽃을 피우고, 문제 심장으로 대수술을 한 아들, 큰 딸도 잘 커갈 즈음, 사상 초유의 직격탄 IMF 환란으로 인한 한국경제의 지각 변동으로 어제까지 번듯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대표가 노숙자가 되고, 잘 나가던 직장인이 졸지에 백수가 되어 정장 차림으로 등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직장이었던 국책 증권사가 산업구조 빅딜의 희생양으로 한 방에 날라가 버리면서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해고 통지서를 받으니 넘어진 놈, 손을 내밀어 주기는커녕 사정보지 않고 밟아대는 격의 채권금융기관의 대출 상환요구는 기일 내 상환 불이행 시 법적 조치에 들어가겠다는 일방적 통보. 수많은 동료들이 망신은 물론 잠적하고 폐가한 경우가 허다했는데 화이트칼라에서 택시기사, 화물운반,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어쩔 수 없는 변신들을 했었다.


    다행히 난 대기업 경력직 공채에 통과하여 새 직장에서 운 좋게 업계 최고의 실적을 거양함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하여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에서 IMF 성공사례로 대서특필했지만 최고의 재벌 대기업에서조차도 공정한 인사원칙 보다 논공행상이 자기 식구 위조로 되는 작태를 보고, 내친 김에 내 사업을 하겠노라 변신을 시도하여 2000년대 벤처붐에 편승한 창업의 대열에 합류했다. 짧은 기간이라 허술한 준비, 취약한 자금력, 별 축적되지 않았던 경영 노하우, 큰 조직에서 규정대로, 과거 선배들이 한 방식대로,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친대로의 그야말로 성선설에 입각한 사고와 업무방식은 거래 상대방에 대한 그릇된 판단과 거래처의 과장된 사업 전망, 불리한 사실 은폐 등을 충분히 판별 못하고 사업을 전개한 결과, 흑자 도산을 했지만 사실상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나는 사업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과거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했었다. 장자가 읊었던 “굴뚝새가 깊은 숲에 등지를 틀어봤자 가지 하나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쥐가 황하 강물을 마셔봤자 자기 배 만큼이다”는 경구를 늘 명심하게 되었다. 그 뒤 기회가 되어 금융 공기업 임원, 대학 강의, 법무법인 고문, 대기업 고위 임원의 직무를 수행했었는데 직무수행 중 항상 뇌리에 새겼던 마음의 자세는 ‘자리에 취하지 않고 이(利)를 생각지 않으며 일을 팔자로 생각한다. 거문고 줄을 팽팽하게 고쳐 매듯(解弦更張) 항상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항상 맨손과 맨발로 홀연히 물러날 각오로 임한다’였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조국 발전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는 것 같고, 제대로 밥값을 못한 국민의 한 사람이다는 사실. 해외에서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후손도 아니고, 참전용사도 아니고, 아쉬운대로 파월 장병도 아니고, 그저 나의 자리에서 버텼고, 남들 보다 뒤지지 않고 잘해 보려 했고, 역경에 처하면 벗어나려고 발버둥은 친 정도고 그나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건강하고 비교적 정상적인 생각을 한다고 자부하는 나는 앞으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 그 부족함을 만회할 수 있는 시간들이 살아온 날보다 짧게 남았음을 항상 잊지 않고 기회가 주어질 때 항상 대한민국을 생각하고 또 후손을 떠올리며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되고 후회를 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나’가 되리라 결심을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