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동아일보 토요일에 만난 사람]“여의도 외도 4년… ‘저가 정치’는 안 했습니다”
  • 관리자 | 2016.06.14 15:05 | 조회 2145
    이스타항공으로 돌아가는 이상직 前 의원 (경영학과 82학번)

    4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마치고 기업 경영인으로 돌아가는 이상직 전 의원은 “아직 정치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이 많다”며 아쉬워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내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하늘에서 보면 나가 어떻게 보일랑가? 아마 작은 개미처럼 보이것지?’

    어린 시절 고향 마을 논 한가운데 있는 황산(凰山)에 자주 올랐다. 높이가 해발 100m 남짓에 불과했지만 김제평야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에 올라가면 이따금씩 지나가는 비행기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소년은 들판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가도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비행기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소년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저비용항공 시대를 연 이스타항공 설립자 이상직 전 국회의원(53·더불어민주당)의 어린 시절 얘기다. 파일럿을 꿈꿨던 아이는 증권사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마흔다섯에 항공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4년 뒤 국회의원이 됐다. 항공사를 운영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국내 항공 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깨기 위해서였다. 4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기업인으로 돌아가는 이 전 의원을 19대 국회 임기 종료 이틀 전(5월 27일)에 만났다. 이날도 지역구(전북 전주완산을) 주민들과의 약속 때문에 오후 9시에야 인터뷰가 이뤄졌다. 이미 자신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을 비운 터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4년간의 국회 생활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는 “아쉽고 안타깝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은 데 대한 아쉬움과 정치가 너무 매도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여야를 떠나 정치가 정말 중요합니다. 각 분야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개혁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려는 행정관료를 견제할 수 있는 건 국회뿐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다 갑자기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항공사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맞닥뜨린 철옹성 같은 독과점 구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일각에선 기업 운영을 위한 ‘뒷배경’을 만들려고 정치를 한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는 통신, 항공, 정유, 자동차, 카드 등 국민에게 산소와 같은 산업이 대부분 몇몇 대기업에 의해 독과점 되고 있다”며 “이 구조를 깨기 위해 저비용항공사를 설립했고, 정치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의정 활동에 대해 점수를 매겨 달라고 하자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자부한다”고 대답했다. 이 전 의원은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입법을 주도했고, 대형마트 의무휴업 법안도 대표발의 했다. 그가 주도한 법안은 대부분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등 주로 ‘을(乙)’을 위한 것들이었다. 활발한 입법 활동을 인정받아 4·13총선 공천 당시 100명이 넘는 당 소속 의원을 대상으로 한 내부 평가에서 5위 안에 든 것으로 알려졌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항공사를 설립했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그였지만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나전칠기 유통업을 하던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장남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큰형은 가구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해 결국 사업에 실패했다.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큰형의 사업 실패는 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큰형 집에 얹혀살았는데 형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한창 사춘기 때여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됐고 결국 가출까지 했죠.” 


    큰형 집에서 눈칫밥을 먹던 고등학생 이상직은 자장면 집에서 숙식을 하며 ‘중국집 셰프’가 되려고 가출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설거지와 청소만 실컷 하다 결국 중국집까지 찾아온 큰형수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참, 세상 일이 쉬운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유달리 수학을 잘해 명문대 합격도 기대했지만 대학 입시 4개월을 앞두고 입시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이다. 그는 “정말 비운의 81학번이었다”며 “학생들이 꿈을 키워가는 시기에 갑자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입시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고교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 들어간 대학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재수를 선택했다.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몇 달간 다시 준비했지만 최하 등급이었던 내신 성적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어릴 때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항공대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시력 때문에 항공운항과는 지원할 수 없었다. 교통비를 아끼려고 친구에게 부탁한 항공경영과 지원서는 친구가 원서 접수비를 술값으로 날리는 바람에 접수도 해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국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현대증권 펀드매니저가 됐고, ‘임원급 대리’라는 시샘을 받을 정도로 잘나갔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잘나가던 펀드매니저 생활을 접었다. 사표를 던진 후 경영 자문을 하던 한 기업 오너의 제안으로 그 기업을 인수하게 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몇 년 새 열 배 가까운 성장을 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07년 10월 이스타항공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김포공항 근처 방화동에 작은 사무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책상 서른 개, 사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회의실도 하나밖에 없어 신입사원 교육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 신입사원은 “항공사에 비행기가 한 대도 없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일부 직원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남은 직원들과 함께 ‘꿈’을 향한 도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1년 뒤 보잉737NG 제트기 한 대를 들여왔다. 지금은 15대로 늘었다.  


    그가 저비용항공사 설립을 추진할 때만 해도 국내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2005년 한성항공이 청주∼제주 노선에 처음 취항했지만 프로펠러기였다. 기체가 작고 소음이 심해 소비자들이 외면하면서 2008년 운항을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저비용항공사가 잇달아 생겨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 전 의원은 “저비용항공사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 저렴한 가격에 질 높은 서비스와 안전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스타항공이 취항 초기 기내 천장과 화장실 등에 그려 넣은 그림들. 이스타항공 제공

     

    파격적인 전략과 상상력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최신형 제트기를 도입하고, 국내 항공사 가운데 처음으로 ‘얼리버드’ 요금제를 내놨다. 일찍 항공권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1만9900원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김포∼제주 왕복항공권을 판매했다. 이 전략은 짧은 시간에 회사를 알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전 의원은 “이런 파격적인 요금제의 토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금융 시스템”이라며 “일정을 미리 계획한 고객은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고, 기업은 항공권을 미리 팔아 자금 유동성을 확보하고 이자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승무원 유니폼은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아닌 ‘동대문표’다. MK(메이드인코리아)패션산업발전협회를 설립한 전순옥 씨(고 전태일 열사 여동생)에게 의뢰해 동대문에서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그리고 이스타항공 모든 노선의 좌석 10개는 중소기업인 전용 좌석으로 지정해 특별할인을 해주고 있다. 


     

    이스타항공 일부 중장거리 노선 승무원들은 기내에서 마술, 게임 등 이벤트로 승객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고 있다.

     

    승객들이 비행기에 탑승할 때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고, 비행기 안에서는 승무원들이 기념사진도 찍어준다. 승객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 상품을 나눠주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이벤트로 단골 고객을 확보해 나갔다. 이 전 의원은 “승객들에게 단순히 항공권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추억과 가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운항 초기에는 답답한 비행기 내부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1호기(스카이호)에는 당시로선 큰돈이었던 1억 원을 들여 천장에 하늘을 그려 넣었다. 마치 비행기 천장이 훤히 뚫린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화장실에는 호텔 스위트룸의 욕조와 한라산이 보이는 창문을 그려 넣었다. 2호기(스페이스호)에는 우주 그림을 그렸다. 임차한 항공기 반환 문제로 지금은 이런 그림이 없어졌다.  


    장치산업 못지않은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아직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지난해 이스타항공은 3000억 원 가까운 매출에 18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3년 연속 흑자 행진이다. 2009년 1월 첫 취항 이후 21만 시간이 넘도록 무사고 운항 기록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저비용항공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 최신형 제트기만 도입하고, 각종 안전 교육과 점검을 철저히 한 덕분이다. 지난해 8월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북한을 방문할 때 이스타항공 전세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내년을 목표로 기업공개(IPO)도 준비하고 있다.  


    기업 경영 복귀를 앞둔 이 전 의원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청주공항에 이스타항공이 취항한 지 7년 됐는데, 중국 노선을 뚫으면서 흑자 공항으로 전환되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됐다”며 “일부에선 여전히 ‘저가항공’이라고 흠집을 내는데 노선 독과점 체제가 깨지면 저비용항공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만년 적자였던 청주공항은 2009년 이스타항공이 취항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합쳐 연간 100만 명 남짓하던 승객이 지난해 20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청주공항 국제선 승객(50만7000여 명) 중 절반은 이스타항공 고객이었다. 덩달아 청주시와 충북도의 지역내총생산(GRDP)도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정치 영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그는 한국과 중국 간 해저터널 건설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주장했다. 한중 해저터널을 만들면 안보 리스크와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이 전 의원은 “120조 원 정도면 충분히 한중 해저터널을 만들 수 있는데 현재 기금운용본부에서 운용하는 500조 원의 연 수익률을 다른 나라 수준으로만 높여도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펀드매니저 출신다운 발상이다. 그는 “한중 해저터널은 정치를 통해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며 “내년 우리 당의 대선 공약에 포함시켜 정권 교체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 숙원 사업인 새만금국제공항 건설도 자신의 힘으로 꼭 이뤄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연 100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을 국내로 데려오는 항공사 사장이 충분히 수요가 있다고 하는데 관료들은 전북 인구만 생각해 꿈쩍도 안 했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청주공항의 성공에서 확신을 얻어 소관 상임위도 아니었지만 국토교통부를 설득해 새만금국제공항 건설 타당성 조사비용 8억 원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는 “국내 지역 인구만 놓고 보면 타당성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중국 거대 시장을 생각하면 각 지역에 공항이 생겨야 한다”며 “이제는 도로 투자를 줄이고 공항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이스타항공 비행기에는 일등석이 따로 없다”며 “아직 비행기 여행을 한 번도 못 해 본 국민이 부담 없이 항공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나의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동아일보 2016년 6월11일자 전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