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시대의 活佛 '백성욱 총장'
  • 최고관리자 | 2019.09.04 17:20 | 조회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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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대 총장시절의 백성욱 박사


    승려·독립운동가·불교학자·교육가·정치인 등 활약


    석조관 등 校舍 신축 진두지휘하며 캠퍼스 면모 일신

                           

     

    총장·이사장·동창회장 3직 모두 지내


    백성욱 박사는 시대의 활불活佛로 불려 진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불계佛戒를 받은 승려로서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을 1919년에 졸업, 그해 3.1운동과 상해임시 정부에도 참여한 독립운동가 이며, 1922년엔 독일 뷔르쯔부르크(Wirzburg)대학에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불교형이상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불교철학자다. 독일에서 1925년 귀국한 후 192628년까지는 모교 불교중앙학림 교수를 지내고 1930년 금강산으로 입산, 안양암 지장암 등에서 10년간 수도-도인이 되어 1940년에 하산한다.

     

    해방 후에는 6.25가 나던 19502월부터 동 7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1951년 광업진흥공사 사장, 1951년 동국대 총동창회 회장, 1953년 동국대 총장, 1955년 동국학원 이사장(동대 재단), 1955년 대광유지주식회사 사장, 1957년 고려대장경 보존회 회장(이때부터 동국대에서 고려대장경 영인본 간행 시작), 1957년 재단법인 경기학원 이사장(경기대) 등을 역임했다.


    백성욱 박사에겐 따라 붙는 명칭이 많다. 승려, 독립운동가, 불교학자, 시인, 교육가(교수, 대학 총장), 정치가(내무부장관, 1952 · 1956년 부통령 출마) CEO(鑛振公 사장 등), 도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분은 역시 이다. 그러므로 그를 살아있는 부처같다 하여 사람들은 활불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백 박사가 수도도 많이 했지만 여러 직책을 맡아 일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았던 것은 심체가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전술한대로 이 심체 불의 이니 무슨 오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백성욱 박사는 말한다. “한 생각이 부처님을 향해 있으면 모두가 출가자라고-.

     

    백성욱 박사는 총장 재임시절 매주 월요일마다 인류문화사특강을 열었다,

    이 특강은 매우 재미있고 그 때 학생들이 좀체로 접해 볼 수 없는 세계사와 다양한 인류문화에 관한 것들이어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강의 장소는 8백석이 넘는 대학 중강당인데 매번 자리가 꽉 채워졌다. 학점을 요하는 강의도 아닌데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고 교수 직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명강의로 소문이 나서 심지어는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학생들도 이 특강을 들으러 많이 왔다고 한다.

     

    백성욱 박사는 총장 재임시에도 동국대 대학원에서 여러 해 동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승조의 <조론肇論> 혜심(고려승 慧諶)<선문염송禪門拈頌> 승조의 <보장론寶藏論> 그리고 화엄경 등을 강의, 많은 불교학자들을 길러냈다.

         

    오늘의 남산캠퍼스 터전 닦은 일등 공신


    동국대학교는 서울의 안산案山인 남산 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대학본부와 명진관이 있는 캠퍼스 중심에 서면 청와대가 정면으로 마주 보이면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에 보면 서울의 야경이 더욱 장관이다. 시내 대학들 중에 이런 명당을 차지한 대학이 어디 또 있겠는가! 주소로 말하면 서울 중구 필동로 130(구 중구 필동 326번지)이다.

     

    이 대학 터는 설립자인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해방 후 1946년 국유화된 일본 적산을 정부로부터 인수함으로써 생긴 것이고, 여기에 오늘날 아담하면서도 거대한 대학을 건설한 것은 백성욱 박사다.

    6.25 전쟁 휴전 협정은 백성욱 박사가 동국대학교를 서울로 환도 시키고, 이해(1953) 11월 현 필동 교지 가설 식장에서 총장 취임식을 가졌다.   

     

    필동 교사로 이전하기 전 불교전수학교와 중앙학림은 1925년부터 명륜동 1번지와 혜화동 1,2번지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북관묘터를 빌리거나 혹은 사유지를 매입하여 부지 2,716, 3,600여평, 벽돌 건물 251평을 포함한 모두 601평의 건물을 1927년까지 확보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하였고,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부터 해방 뒤 506.25가 터지기 전까지 이 건물들은 여전히 혜화전문의 교사였다. 그러니까 1906년 원흥사의 명진학교로부터 1945년 혜화전문학교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들은 39년 동안 창신동과 혜화-명륜동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남산 필동의 캠퍼스는 명실 공히 동국대학교의 새 터전이었고, 이것은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상아탑을 쌓은 것은 백성욱 총장이다.

    앞서도 현 남산 동국대 자리는 일본 절터라고 말한바 있다. 이 절터는 해방 후 국유화 되어 46년 조계종에서 정부로부터 이양받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정확히 말해 이곳에는 일제 시대에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서본원사西本願寺 경성별원京城別院이 있었다.


    정토진종은 1321년에 창종된 본원사를 말하는데, 1602년 분리되어 나간 동본원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서본원사라 칭하였다. 이 서본원사는 19세기말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조선 각지에 별원을 두었다고 한다. 경성 별원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연대가 확실치 않지만 현재 동국대 법당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 정전인 숭전전崇正殿1926년 조계사에 매입되었다가 다시 서본원사 별원으로 옮겨겼다는 기록(나무위키)을 참조 하면 대략 2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동국대학교에는 서본원사의 유물로 일본식으로 지어진 법당과 여러 사우寺宇(지금은 다 없어졌음) 말고도 조선 왕실의 귀중한 유물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경희궁 숭전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0)이요, 또 하나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평양에 지은 궁궐 풍경궁豊慶宮의 정문 황건문皇建門 이다. 숭정전은 서본원사 시절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쓰였다.


    황건문은 규모가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 매우 품격이 있고 우아하였다.

    60년대 우리가 재학 시절에는 대학 정문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헐려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그 당시 재학생들은 이 황건문과 지금의 명진관인 석조관을 대학의 상징처럼 여겼다.

     

    백성욱 총장은 취임 다음 해인 19544월 당시 한국 건축계의 거장 고송민구宋旼求 설계사를 초빙, 대학 건축본부 소장으로 앉히고, 교사의 신축에 일로 매진한다.

    불교 종단과 재단에서는 1946년 동국대학 인가를 받고 혜화동 전문학교 시설로서는 새로 입학하는 대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어 이 필동의 서본원사 자리를 동대 교지로 정하고, 임시 교사를 꾸려가며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 때는 아직 그대로 보존된 서본원사 건물들과 숭정전 등 목조 기와지붕 7617, 그리고 판자 건물 280평이 시설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1953년 이후는 6.25 전쟁을 겪은 후라 백성욱 박사 취임 당시는 그 마저도 황폐화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것이고, 더구나 이제는 여러 단과 대학을 거느리는 종합대학교가 되어서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교육 시설을 필요로 했었다.

    이러한 불모지에 백성욱 박사는 황야의 거인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서본원사 터에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대지가 23,987평이 확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건축본부를 둔 백성욱 총장은 대학 후원회(회장 李潤鎔)를 구성하여 후원금도 만들고 또 미 8군의 원조도 받는 등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 대학본부로부터 강의 동 과학 실험실 등을 착착 건설해 나아갔다. 이러한 대학 건설 과정에 있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백성욱 총장시 건립된 명진관(석조관) 신축관계자 기념사진


    "남산에 건물을 짓다니" 이승만 대통령 분노

    "백성욱총장이 짓는다"는 보고에 노기 풀어 공사 가능

     

    연도는 미상이지만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현재 청와대 자리)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을 바라보니 여기에 큰 공사판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바로 마주한 자리에 감히 남산을 까고 건물을 세우다니-대통령은 격노하여 비서에게 저 짓을 하는 자가 누구냐? 고 물었단다.

    그러니까 백성욱 박사가 동국대학교를 짓는 중이랍니다

    하고 비서가 대답 했더니, 대통령께서 이내 얼굴에서 노기를 풀며 응 그러냐! 그럼 놔둬라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백성욱 박사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학교 건설 공사는 당장 중단되고, 이어 취소되었을 것이다. 동대로서는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아리 고개를 넘으시다 남산 동대 건설 현장을 멀리서 보시고, 경무대로 드시기 전 여기에 들러 격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동대는 사기충전 할밖에-.

     

     

    오늘의 명진관(석조관)



    열정과 능력과 힘을 가진 지도자


    백성욱 박사는 비상한 능력과 힘을 가진 지도자였다. 거기다 사람을 제압하고 복속 시키는 일종의 마술? 같은 매력도 있었다. 좀 크게 표현한다면 영웅적 카리스마(Charisma)라 할까?

    그가 6.25 전란 직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불과 몇 해만에 동국대를 명문 사학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카리스마 덕이었다.


    대학이 건물만 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과 시설이 하드웨어라면 여기에 들어 갈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수준 높은 교수진을 짜는 것이고, 우수한 학생을 뽑는 것이며, 엄정한 학사 관리와 효율적 재무관리다. 이 모든 것이 하모니를 이루며 잘 진행될 때만 대학은 올바르고 실력 있는 젊은 지성들을 길러 낼 수 있다.

    그런데 백총장의 카리스마는 하드-소프트웨어 이 두가지에 다 능했다. 50-60년대 동대 교수진은 참으로 쟁쟁했다.

     

    그래서 백총장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겸직했던 광진(광업진흥공사)사장 자리를 내 놓으면서 동국대학교 총장, 동창회장, 그리고 재단 이사장까지도 함께 겸직했다.


    19604.19 혁명 때 동국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대학본부와 강의동인 석조관(현 명진관), 그리고 석조관 뒤에 있는 과학관, 그 옆에 거대한 온실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아직 사용전인 도서관과 교수 연구실을 겸한 거대한 건물이 동편에 완공되어 있기도 했다. 대학 본부는 8백석의 큰 강당과 총장실 이사장실, 각 학처장실 그리고 각종 행정사무실, 연영과 실험극장, 강의실 보건소 동대신문사, 학생 직원 식당 등 대학의 핵심은 물론 온갖 부대시설을 다 갖추고 있었다. 모두가 백성욱 총장의 땀과 혼이 어린 시설물들이었다.


    1958년에 완공한 석조관(현 명진관)2015년에 서울시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3층의 이 석조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1950, 6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한국에도 이런 건축물이 있나! 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기 한량없다.

    그래서 나는 이 석조관을 가리켜 동대를 건설한 활불 백성욱 총장의 사리舍利라고 한다.

    사리가 꼭 스님의 법체를 불로 태워야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전에 부처님 수행이 철저하고 그의 피와 땀, 혼으로 만들어 남긴 업적이나 유물들이 불심佛心을 상징하는 불멸의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그 수행자의 사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점에서 장차 언젠가는 동대 교정에 이 대학의 중흥조 활불 백성욱 총장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

     

    역대 대학 인물들 기려 나가길


    1906년 동대문구 창신동 한 사찰에서 출발한 근대 교육기관인 명진학교가 금세기들어 이만큼 국제적인 큰 대학교로 성장하기까지는 불교종단의 설립자들은 물론 그 외에 수많은 교수 학장, 총장 등 인재들이 피와 땀을 쏟은 결과일 것이다. 불교 종단 학교라고 해도 현실 사회에서 불사를 행하고 교육 사업 등 각종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은 부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분명 중생, 즉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백여년 동안 대학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동대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기리는 인물이 없다. 어디에도 흉상 하나 없으며 대학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도 없다. 불행의 불행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동대에는 학문적으로 우뚝한 교수들도 많고 학교발전에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들도 많으며, 백성욱 박사처럼 학교 흥융興隆을 위해 금자탑을 쌓은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분도 추앙하는 인물이 없다. 동국맨들이 인과를 모르고 살아온데 원인이 있고 크게는 대학에 뚜렸한 주인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설립자측인 불교 종단은 종권의 실세들이 수시로 바뀌고 종단에서 파견되는 법인 이사들도 잠시 스쳐가는 자리이니 누가 이 동대에 대하여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전통을 세워 갈 수 있겠는가.


    백성욱 총장만 보더라도 그를 총장으로 추대한 재단 이사회는 이른바 대처승측 종단이었고 지금은 비구승측 종단이 주인이다. 그러므로 백성욱 총장이 아무리 동대 발전의 중흥조라 해도 오늘 날 조계종 종단에서 그를 크게 떠 받들기는 어렵다.

    때문에 결론으로 말하면 동국대학교 총동창회가 나서서 대학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역대 대학의 인물들을 기리는 사업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역대 교수 학장 총장 이사장 동창 등에서 동국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들을 가려내고 받드는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송 재 운 (철학 60,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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