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42년만에 밝히는 秘話 … 재학생 100여명 생명 지켜
  • 최고관리자 | 2019.05.24 13:54 | 조회 1737



    설악산
    12선녀탕 등반중 폭우 조난 직감 아찔했다

     

    점심 도중 몽둥이 휘두르며 산으로 올려보내 가까스로 위기 모면


    장 동 락 (정치외교70/ 행정대학77)

    KOTRA 스톡홀름 무역관장

     

    모교 동국대학교에 대한 추억과 그 속에 담긴 에피소드도 많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가 늘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꽃다운 청춘 후배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어서 더욱 뚜렷하다.시간을 42년전으로 거슬러 1977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모교 교양학부에서는 몇 년전부터 1학년 간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간부수련회(프로젝트)를 개최하고 있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는 심신단련과 리더십을 키우는 프로그램으로 매년 이어져 동국대학교 교양학부의 자랑스러운 주요행사였다. 나는 군 제대 후 1학년으로 복학하여 프로젝트 73’ 에 참가했으며, ‘프로젝트 ‘74’에는 서브리더로 요청받아 2학년임에도 다시 참가했었다.


    교양학부가 주관하던 프로젝트1976년 제4회를 마감하고, ‘프로젝트 동우회라는 이름의 써클이 발족되어 그 뒤 동우회 주관으로 진행하게 된 것으로 기억된다.  8월초, 프로젝트동우회 백봉흠 지도교수님이 내 직장인 회현동 무역센터로 급히 오셔서 이선근 총장께서 학도호국단 사단장을 역임했던 장동락 동문이 프로젝트 77’ 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출발 승인을 내주겠다고 보류하셨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과 총장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뜻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85() 10시 교정(불상 앞)에서 프로젝트 ‘77’ 학생대표가 총장님께 출발신고를 한 후 여러 대의 버스에 분승, 설악산으로 향했다. 정해진 산행코스는 십이선녀탕 - 대청봉 - 양폭산장 - 비선대 - 설악동 - 낙산휴양소였다.

     

    산행 이튿날 화창한 날씨 속에 일정에 맞추어 이른 시각에 출발, 십이선녀탕 계곡으로 산행하였다. 11시 조금 지난 시간에 100여명이 취사를 할 수 있는 넓은 곳을 만나자 조별로 식사준비를 하도록 했다.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무렵, 푸른 하늘 아래 맑은 물이 마치 마당 같은 넓적한 바위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들이 어울려 풍기는 정취가 마치 지상낙원과도 같았다.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식사준비가 된 조부터 즐겁게 점심 식사를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 역시 같은 조원들과 식사를 하다가 산 정상 위의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공포감이 엄습하였다. 저 먼곳 산 정상에 시커먼 먹구름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너무 다급함을 느꼈다. 그 시각에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공포를 혼자만 느낀 것이다.

     

    식사하던 것을 멈추고, 같이 식사를 하던 조원들에게 빨리 정리해서 산기슭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함과 아울러 학생 대표를 불러서 전달토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전달, 전달, 모든 대원들은 지금 하던 동작을 멈추고 장비를 챙겨서 즉시 계곡 오른쪽 산위로 오른다. 실시

     

    심각성을 모르는 학생들이라 밥이나 다 먹고 갑시다” “식사중인데 왜 그래.....”

     

    교수님 중 한분이 장 대장! 대원들 밥이나 다 먹도록 시간 좀 더 주지 갑자기 왜 그러나...!’ 하며 나를 나무랬다. 그들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초를 다투는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달방식으로 하달한 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허리에 차고 있던 큰칼로 나무하나를 잘라서 작대기(몽둥이)를 만들어 계곡 마당바위 여기저기에 앉아 밥을 먹으며 거동할 낌새를 보이지 않는 대원들, 물속에 발을 담구고 물장구치는 남녀학생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식기들이 몽둥이에 의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이것저것 챙겨들고 허급지급 서둘러 산으로 오른다. 대원들 중 몇 명은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했을 것이리라......

    세분의 교수들을 포함해 많은 대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리더의 모습을 보고 공포심과 함께, 멀쩡했던 리더(산행대장)가 왜 저러는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며 아울러 반감도 가졌을 것이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오직 한 사람일지라도 사상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졌던 의문과 궁금증의 답은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빨리 올라가지 못해라고 소리치면서, 몽둥이를 휘둘러 학생들을 계곡에서 정상을 바라보는 오른 쪽의 산기슭으로 모두 올려 보낸 뒤 혹시나 잔류한 대원이 있는지 다시 확인한 후 내가 마지막으로 계곡에서 산기슭으로 발을 올려놓는 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빠른 속도로 마당바위 일대를 휩쓴 것이다. 미처 챙기지 못한 코펠 식기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밥을 마저 먹겠다고 조금만 더 지체하였다면 그들 모두는 급물살에 밀려 마당바위 밑의 6~7 미터 낭떠러지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 쳤을 것이며, 급류에 휩쓸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이 모든 상황이 5분 정도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모두가 경악해 하며 한참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이다.


    산은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현재 있는 위치의 하늘이 청명하다고 해도 산 정상의 하늘에 검은 비구름이 생성되면서 소나기를 쏟는다면, 엄청난 양의 물이 계곡으로 집수(集水)되어 산의 높이와 경사도에 따라 속도가 빠른 급류로 아래 위치의 계곡에 몰아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로부터 불과 몇 년 전에 이화여대생 8명이 등산 중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급류에 휩쓸려 모두 사망하였으며, 며칠이 지난 후에 북천(北川)에서 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역시 맑은 하늘 아래에서 졸졸 흐르는 십이선녀탕 계곡의 넓적한 바위 어딘가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자연이 주는 정취에 취해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산을 제대로 아는 리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에 반해 동국대학교 프로젝트 ’77‘팀은 나의 리딩으로 한 사람의 사고도 없이 모두 양폭 산장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대원 모두가 안전하게 설악산을 횡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리선근 총장님의 혜안과 제자들의 안전을 염려한 배려심이 원동력이 되었고, 그리고 산행하는 동안 전 대원들이 나를 믿고 리딩을 잘 따라준 결과라 할 것이다.

     

    이글을 쓰면서 갑자기 광주에 한 번도 간 일이 없다는 자, 5.18사태 당시 13세였던 자가 광주민주화 유공자들로 지정되어 국민이 낸 세금으로 거액의 혜택을 누린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저들과는 달리 날조하지 않은 진실, 즉 국가적 재난이 될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에 100여명의 인명 피해를 예방한 나의 공로(?)는 세월과 함께 묻혀지는 건가?

     

    2019.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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